어떻게 인종적 불비례는 경찰 폭력의 패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가
How Racial Disparity Does Not Help Make Sense of Patterns of Police Violence (Adolph Reed)
어떻게 인종적 불비례는 경찰 폭력의 패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가 (아돌프 리드)
• 출처: 논사이트 / 2016년 9월 16일
https://nonsite.org/editorial/how-racial-disparity-does-not-help-make-sense-of-patterns-of-police-vio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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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살해되는 사람들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미국인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의 거의 두배이다. 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살해되는 사람들 중 라티노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미국인 중 라티노가 차지하는 비율과 거의 같다. 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살해되는 사람들 중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미국인 중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의 4분의 3 바로 위와 5분의 4 바로 아래 사이이다. 이 불비례는 Black Lives Matter 라 불리는 운동, 그리고 자의적인 백인 공권력의 수중에서의 임박한 죽음 위험이 미국에서 흑인의 지위의 근본적인, 확정적인 조건이어 왔다는 끊임없는 주장의 근거이다.
이 논변 노선과 불만, 그리고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의례적 선언들에 대한 요구는 “인종주의”가, 그 불비례로 표현되는 부정의의 원인이자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 – 인종주의가 경찰이 자행하는 살해 패턴의 단일하거나 최고의 부정의임을 함축하는 주장 - 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인종적 불비례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한 걸음 물러서면 백인이 매년 경찰에 의해 살해되는 사람들의 거의 절반이라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인종적 불비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요구는 동시에 다른 가능한 인과적 불비례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경찰 살해의 95%가 중위 가구 소득이 10,000 달러 미만인 동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100만명당 경찰 살인율이 가장 높은 주들은 백인이 가장 많이 사는 주들이다. 이 주들에서 경찰 살인의 높은 비율이 그 주들의 매우 적은 흑인 인구에 집중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경찰에 의해 살해된 29명 중 17%가 흑인인 콜로라도를 예외로 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우스 다코타, 와이오밍, 알라스카에서 경찰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 중에는 흑인이 없었다. 뉴 멕시코에서 2015년에 경찰에 의해 살해된 20명 중 흑인은 없었다. 아리조나에서는 경찰에 의해 살해된 42명 중 2% 조금 위만이 흑인이었다.
이 주들에서 분명한 것은 경찰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 대다수가 라티노, 네이티브 아메리칸, 그리고 가난한 백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경찰 살인율이 높은 주들의 패턴이 시사하는 것은 경찰 폭력에 대한 비판적 논구의 초점이 될 수도 있었다. 즉 그 패턴은 보복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산출된 경제적으로 주변적이고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계급 인구의 주머니들을 봉쇄하고 억제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출현하는 치안 유지 접근법의 산물이다.
우리가 흑인이 최대 희생자들이라는 주장과 더불어 시작하고 끝내야 하며 공허한 구호들의 영창에 의례적 순종을 바쳐야 한다는 목청 높은 강조는 실질적으로는 경찰 폭력 패턴의 보다 심층적인 원인들 - 가파르게 역행적인 상향 재분배와 그것의 사회적 수반물들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강화 - 에 주목하지 말라는 요구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의도들과 목적들 면에서 경찰 폭력은 주로, 배타적으로는 아니어도, 흑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 우리가 효과적으로 그것에 도전할 수 있을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유일한 토대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켜야 한다는 요구이다.
흑인 신체들이 인종주의적으로 경시당해온 면면한 역사라는 이미저리에 관한 또 하나의 계시적인 데이터는 경찰의 25세 이하 흑인 살해가 1968년에서 2011년 사이에 79% 감소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 25세 이상 흑인 살해는 61%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별로 놀랍지 않다. 시민권 운동이 거둔 승리는 투표권법의 함의가 실질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실질적이었다. 도심 흑인 지구에서의 일상적인 경찰 테러는 그 당시가 현재보다 전반적으로 더 악질적이었다. 전혀 공허한 과장법이 아니었던, 그 당시 블랙 팬더의 몇 개 안되는 구호들 중 하나는 경찰의 역할을 흑인 커뮤니티의 “점령군”으로 특징지었다.
내 요점은 경찰 폭력에 관한 격분을 폄하하거나 부정의의 중력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경찰 살인율의 감소나 실질적인 방향 변화에 주목함으로써 흑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의 성격과 근원을 이해하는데 “인종주의”나 “백인 우월주의” 같은 물화된, 초역사적 추상물들이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전혀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사회적 맥락들 속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더 복잡하거나 적어도 별개적인 행위들의 단축된 특징화들일 뿐이다. 나쁘게는,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더 자주는, 그것들은 설명의 대안들로 제시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이슬람 연합의 야쿱 이야기처럼 일종의 악마 이론으로 기능한다: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는 세계 속에서 사태들이 독립적으로, 즉 마술적으로 벌어지게 할 수 있는 것들로 표상된다. 이것은 인종주의는 미국의 “국가적 질병”이나 “원죄”이다와 같은 정식화들에서 표현되는 판타지이다. 이 정식화들은 우연찮게도 자유주의적 인종 관계 이데올로기의 요소들인데, 이 이데올로기는 전후 미국 정치 담론에서 정치경제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심리학 및 편견과 불관용이라는 개인주의적 관념들에 뿌리를 둔 인종적 평등 관념의 분절들로서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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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논지만 축약번역했습니다. 필자인 아돌프 리드는 펜실베니아 대학교 정치학 명예 교수로 인종주의와 미국 정치 문제를 전문으로 합니다. 흑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에 부제를 단다면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이 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필자가 자신의 동료로 언급하는 월터 벤 마이클스 Walter Benn Michaels 는 '계급정치의 일차성'이라는 이 글의 논지의 줄기찬 주창자들 중에서도 선구자급에 해당하는 인물인데, 몇년 전에 이 양반이 같은 논지로 New Left Review 52호 (2008년)에 기고한 ‘Against Diversity’를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 기고문은 Walter Benn Michaels, The Trouble with Diversity: How We Learned to Love Identity and Ignore Inequality (2006) 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이 양반의 국역된 저서는 원서가 2004년에 출간된『기표의 형태: 1967년부터 역사의 종언까지』(The Shape of the Signifier: 1967 to the End of History) 딱 한 권인데, 비평이론에 관심깊은 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